쓰는 사람이 아니라 설계하는 사람
테크 제품 라이팅 일을 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 중 하나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회사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 이해받기 어렵다는 점이다.
마케팅 성과 분석 도구인 우리 제품은 마케터, 대행사 등 전문가 집단을 위한 고맥락 제품이라 사용성과 사용 경험 측면에서 UX 문구는 물론이고 헬프센터 가이드의 중요도도 상당히 크다. 그럼에도 라이팅 직무에 대한 인식은 아무래도 ‘텍스트’와 ‘쓰기’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 같다.
킥오프 때부터 라이터를 초대하는 건 너무 좋지만 (이 당연한 게 안 되고 있는 데가 많다) 빠듯한 인력으로 결국 디자인 나오고 개발 끝나갈 때 일정 맞춰 완료하기 급급하다. ‘쓰기’를 넘어서는 기여를 할만한 여력과 기회가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딱 직무 이름만큼의 인식에 머무는 것 같다.
2개 회사에서 팀 리드를 하면서 이런 얘기는 항상 들었다. UX 라이팅 관련 책이나 아티클에도 항상 나오는 얘기다. 인식은 실제 업무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참여했어야 할 회의에 불려가지 못하고, 관여했어야 할 의사결정을 뒤늦게 알게 된다. UX 개선이 필요한 문제를 문구로 막아보려다 제품이 더 복잡해지기도 한다.
말의 힘은 강력하다. ‘라이터’라고 부르면 쓰는 사람이 되고, ‘디자이너’라고 부르면 설계하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언어를 다루는 사람 아니던가 잘하는 거 해야지, 하며 올해 초 우리의 역할을 새로운 언어로 정의했다.

1️⃣ 로드맵 기반 신규 기능 정보 설계
프로덕트 라이팅은 이미 설계가 끝난 UI/UX에 텍스트를 써넣는 일이 아니다. 사용자는 어떤 목적을 갖고 여기에 왔을까, 가장 알고 싶은 건 뭘까, 그 정보를 어떻게 전달해야 눈에 잘 띄고 쉽게 이해될까. 정보의 위계와 구조, 흐름과 의도를 설계하는 일이다. 더 정확히는 UI/UX 디자인과 결합해 직관적인 사용 경험을 설계하고 효과적인 제품 사용을 유도하는 일이다.
2️⃣ 콘텐츠 품질 및 활용도 최적화
콘텐츠의 본질은 ‘생명력’이다. 죽지 않고 살아서 지금도 활용되는 정보인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게 된 것들을 지속적으로 검토하지 않으면 누렇게 마른 잡초처럼 잘못된 정보가 검색 결과와 AI 답변에 섞여 들어가고, 특히 CS에 큰 비효율을 초래한다. 기존 콘텐츠의 품질과 활용도를 최적화하는 일은 콘텐츠를 새로 만드는 일 못지 않게 중요하다.
3️⃣ 고객 피드백 대응 콘텐츠 생산
전문가를 위한 고맥락 제품이라면 제품 언어와 유저 가이드만으로는 부족하다. VOC로 반복 유입되는 피드백에 직접적인 해결책이 될 기획 콘텐츠가 필요하다. 블로그는 마케팅팀이 쓰고 고객 성공사례는 CS팀이 쓰지만 이런 콘텐츠는 제품팀이 쓴다. 고객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문의를 효과적으로 줄이는 기여도에 비해 잘 모를 때가 많은 것 같다.
4️⃣ 대고객 커뮤니케이션
각종 공지, 이메일, 뉴스 등이 해당한다. 고객이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사안을 다룰 때가 많고, 회사를 대변해 고객과 직접 소통하는 성격을 띠어서 신뢰도와 브랜딩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정확성은 기본이고, 전략적 메시징, 일관된 보이스와 사안에 어울리는 톤, 말끔한 서식 등 신경 쓸 게 많다. 실수하면 헤진 양말 뒷꿈치만큼이나 브랜드를 손상시킬 수 있다.
5️⃣ 콘텐츠 기반 제품 사용성 개선
UX를 개선하면 가장 좋지만 예정된 로드맵이 많고 근시일 내에 추진되기 어려울 때는 텍스트 중심으로 개선을 시도한다. 이해가 부족한 채 작성했던 내용을 정확하게 수정하고, 보다 정돈된 용어로 명확성을 높이며, 표현을 다듬어서 가독성을 높이거나 UX 맥락에 어울리는 배치로 바꾸기도 한다. 라이팅에 주로 기대하는, 덜 효과적이지만 가성비는 좋은 시도다.
6️⃣ 콘텐츠 운영 고도화 및 표준화
용어와 표현, 보이스를 일관되게 유지해야 혼선 없이 제품의 전문성과 신뢰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용어집, 가이드라인, 보이스앤톤을 수립하고, 여러 접점에서 일관되게 적용되도록 운영 시스템과 협업 프로세스도 만들어야 한다. 라이터 외에는 잘 신경쓰지 않는 영역이라 적은 인력으로 실무만 하다 놓치지 않으려면 더뎌도 해내야 하는 중요한 역할이다.
7️⃣ 사내 지식 인프라 구축
에어브릿지처럼 어렵고 복잡한 제품은 라이터가 작성하는 콘텐츠가 곧 내부 교육 자료이기도 하다. 남을 이해시키기 위해 먼저 스스로 이해해야 하는 라이터들이 제품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을 때가 많다. 여력이 된다면, 각종 콘텐츠를 지식화하고 해외 팀을 위해 언어별로 지원하는 것도 라이팅 인력을 활용하는 방법이다.
팀 노션에서 위 7개를 영역(Area)으로 정의하고 모든 업무(Task)에 부여한 다음, 영역별 비중을 차트로 시각화해 팀 홈 상단에 배치했다. 로드맵 티켓 치며 소위 '쓰기’를 하는 업무는 전체의 40%에 불과하다. 그밖에 사용성 및 UX 개선, 제품 품질 관리, 고객 문의 지원, 제품 브랜드 구축 및 유지관리의 역할을 한다.
우리가 하는 역할을 눈으로 확인하며 팀원들이 좀 더 자부심을 느끼고 임팩트에 집중하길, 그리고 역할에 대한 이해와 존중과 인정을 좀 더 받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