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지출, 올해의 주제
최근 몇 년, 그 해 내 인생의 주제를 정의하는 듯한 큼직한 지출이 있었다.
2023
옷을 많이 샀다. 근 3년 만에 일을 다시 시작하는 데다 코로나 3년 동안 첫 3년 육아를 하느라 밖에 입고 다닐 만한 옷이 별로 없었다. 더군다나 서울, 제주, 버지니아, 뉴저지, 캘리포니아, 하와이 등 2개 국가 6개 시도 12개 집을 박스에서 박스, 가방에서 가방으로 옮겨 다녔던 터라 당시 내 옷장은 우아하게 말해서 '미니멀'했다.
패션은 정체성의 문제였다. 엄마가 된 자연인, 전염병 유행기의 이방인으로 살면서 나의 정체성은 뭐였는지 알 길 없이 그저 살았던 것 같다. 내 이름 옆에 직무와 직책이 적힌 명함을 받고 9-6 직장인 자아에 다시 적응해 가는 동안 옷 사기를 멈출 수 없었다. 잊고 있던 취향과 그간 쌓인 안목을 꺼내 나를 열심히 치장했다. 내 안의 내가 밖으로도 보일 수 있게.
그해 연말에 쓴 회고의 일부를 인용하자면, "다시 사회 생활을 하고 돈을 벌고 돈을 쓰며 나(自身)를 완전히 되찾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어떻게든 그간 내 안에 쌓인 것들이 마침내 오와 열을 이룬 듯했다. 꺼내서 쓰기만 하면 되지 않냐던 사람들 말이 믿기기 시작했고, 그 어느 때보다도 나를 믿게(自信) 됐다."
2024
달리기를 다시 시작했다. 원래 진지하게 할 마음이 설 때까지 전문 의류나 장비는 거의 사지 않는 편인데 지금까지 해 본 것 중에 가장 많은 아이템을 산 것 같다. 12, 3년 전, 달리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마라톤' 하면 춘천마라톤 코스 위로 쏟아지는 중장년층 남성들의 이미지가 강해서 지금 같은 러닝 패션은 없었다.
사람들이 신발이나 장비 같은 걸로 갑론을박하는 걸 보면 '얼마나 달리려고 그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런데 점점 진지해지니 결국 하나씩 사게 되더라. 그렇게까지 짧고 얇은 바지를 사게 되고, 그렇게까지 요란해뵈는 신발도 사게 되고, 그렇게까지 기능 많고 가벼운 시계도 하나 사게 되고, 그렇게까지 필요할까 싶은 실리콘 물통도 사게 되고, 결국 그렇게까지 시원해야 될까 싶은 싱글렛도 사게 됐다.
대회에도 많이 썼다. 특히 지방에서 열리는 대회는 숙박을 안 하기 어려워서 (새벽 4시에 출발해서 8시부터 대회 뛰고 당일로 돌아올 정도의 체력은 없음) 대회비에 교통비까지 많이 깨졌지만, 정말 재밌었다. 도전하고 경험하는 데 많이 쓴 한 해.
2025
Mindful Running School의 연간 프로그램에 가입했다. 1년치 참가비를 생각하면 적지 않은 돈이었는데 한 달 기준으로 계산하니 10만원도 안 돼서 마음 먹고 결제함. 부상으로 시작한 한 해였고 1년 동안 이어가며 기복은 있었으나 '해야 한다'는 강박이나 '못 했다'는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도전과 경험도 좋지만, 압박감에 다그치고 부담감에 무리하고, 그러다가 부상 얻고 병원 다니며 돈 쓰고 시간 쓰고. 이게 무슨 짓인가 회의가 들곤 했다. 본질과 균형을 되찾고 싶었다. 사실 내가 돈 주고 산 건 커뮤니티였다. 비슷한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 마음 편히 내 소신을 좇아도 되는 안전한 공간. 거기서 얻은 배움은 달리기에 국한되지 않았다.
2026
새해를 맞으면서 영어를 다시 좀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5 때 동네 애들 여섯이서 과외로 처음 시작한 이래 다양한 노력과 시도가 있었으나 가장 큰 전환점이라면 스물다섯이 되던 해였나, 영어를 대상이 아닌 일상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을 때다. 중국에서 일할 때 Toastmasters 활동을 하면서 꽤 늘었고, 미국에 살 때 대학원에 다니면서 폭발적으로 늘었다.
빌드업과 펀치라인의 아트인 나잇타임 토크쇼와 스탠드업 코미디, 오늘의 언어가 펄떡이는 소셜미디어, 가끔 읽는 영문 원서와 자주 읽는 온라인 아티클을 통해 영어는 꾸준히 야금야금 늘었고 이제는 꽤나 편한 언어가 됐다. 하지만 어느 수준 이상으로 구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은지 오래라, 다시 한번 '학습'의 노력을 들여보기로 했다. 주변에 권하기만 했던 링글을 해보기로.
목표는 맥락에 똑 떨어지는 의미를 간결하게 전달하는, 세련되고 적확하며 고급진 표현을 구사하게 되는 것. 그래서 의도한 목적에 맞는 의사소통을 통해 의도한 효과를 얻게 되는 것. 표현이 부족하면 말이 길어진다. 말이 길어지면 핵심이 둔해지고. 실력의 향상을 체감하는 수준에 오를 때까지 계속 해볼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