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일 러닝 대회에서 배운 문제 해결의 원칙들
얼마 전 강원도 운탄고도에서 열린 트레일 러닝 20K 대회에 다녀왔습니다. 석탄을 실어 나르던 산간 도로를 트레일 코스로 개발한 길인데 '백두대간의 풍광', '전국 최대 야생화 군락지'같은 홍보 문구에 반해 꼭 한 번 뛰어보고 싶은 대회였어요.
오랜만에 나가는 대회라 설렘 반 긴장 반이었는데요. 대회 준비 과정과 완주 경험에서 얻은 문제 해결의 인사이트를 공유합니다.
인식은 현실적으로 목표는 도전적으로
한 2년 동안 신나게 달리다가 부상을 얻으면서 작년 한 해는 동네 건강달리기 러너로 보냈습니다. 대부분 집 앞 산책로에서 5km 정도만 달렸던 터라 능력치는 많이 떨어져있었어요. 그래도 요가와 근력 운동을 꾸준히 해서 몸이 아주 몹쓸 상태는 아니었고,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해 본 경험이 있어서 거리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20km 거리를 산에서 뛰는 대회에 나가는 건 안락한 5km에 젖어있던 동네 러너에겐 이중으로 도전이었지만, 트레일 러닝은 제가 로드 러닝보다 선호하는 심리적 이점이 있는데다 제한 시간도 너그러운 편이라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도전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설사 시간 안에 완주하지 못한다고 해도 준비하는 과정 중에 더 건강하고 단단해질 수 있으니 조금 어려운 문제를 푸는 게 훨씬 많이 남는 길이라고 믿고요.
진짜 문제를 정의할 것
저의 목표는 대부분의 경우 '부상 없이 즐겁게 완주하기'입니다. 기록을 신경 쓰며 달리다가 레이스를 말아먹어 본 경험이 있는데, 달리는 중에도 괴롭기만 하고 완주 후에도 부상으로 고생했거든요. 트레일 러닝은 지면이 고르지 않고 자칫 크게 다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 점을 명확히 했고, 달리는 과정 중 크고 작은 결정은 여기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마지막 2km를 남기고 허리에 쌓인 피로가 심상치 않아서 돌계단을 엉금엉금 내려왔는데 만약 그때 진짜 문제를 잊고 '마지막 순간까지 걷지 않고 달리기'같은 엉뚱한 문제에 한눈을 팔았다면, 고통을 견디며 괴롭게 완주했거나 부상을 얻고 평범한 달리기도 못하게 됐을 겁니다.
돌파구를 만들려면 힘든 노력을 쏟을 것
집 앞 산책로는 약간의 오르막과 약간의 내리막이 두루 있지만 산길에 비해 굉장히 평탄하고 안전한 환경입니다. 훈련을 위해 찾았던 남한산성도 고도나 경사가 실제 코스에 턱없이 못 미쳤어요. 게다가 남한산성은 일주일에 한 번밖에 못 갔기 때문에 강도 높은 훈련을 더 자주 할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평소에 봐둔 집 앞 등교길 오르막에서 힐 리피트(hill repeat) 훈련을 하기로 했습니다. 딱 적당했어요. 힘껏 달려 올라가서 걸어 내려오며 회복하길 여덟 번에서 열 번 정도 반복하면 약간 어질어질하면서 낮은 신음이 절로 나옵니다. 그래도 오르막 훈련을 하고 나서 평소 돌던 남한산성 코스 2회 돌기에 성공했습니다.
불안하다고 무리하지 말 것
대회 전 마지막 일주일에 제가 집중한 건 잠과 폼롤러였습니다. 러닝 커뮤니티에 '대회날은 시험하는 날이 아니라 축하하는 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험을 앞두고 막판 벼락치기가 별 의미 있을 리 없듯이, 달리기 대회 역시 괜한 미련과 조바심에 막판 특훈을 했다가는 몸만 상할 수 있거든요. 잠과 폼롤러를 원래 생각만큼 충분히 챙기진 못했지만, 그래도 '완주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으로 무리한 짓을 벌이지 않은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괜한 리스크를 끌어들여서 그간 쌓은 기본만으로도 해낼 수 있는 일을 망치지 않았으니까요. 못내 남는 아쉬움은 다음번 동기부여로 넘기면 됩니다.
어렵고 중요한 문제를 먼저 풀 것
20K 코스에는 4개의 체크포인트(CP)가 있습니다. 통과 기록도 측정하고, 마실 것과 먹을 것이 제공되어 중간 정비를 할 수 있는 곳인데요. 이 중 CP3에 걸려있는 제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9.5km, 즉 절반 지점을 정해진 시간 안에 통과하라는 요구사항인데, 문제는 출발점부터 CP3까지 구간의 대부분이 산봉우리를 향하는 오르막의 연속이었다는 겁니다. 남한산성 훈련의 평균 페이스 기준으로는 여유로웠지만, 그렇게 긴 구간을 계속해서 올라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솔직히 많이 쫄렸어요. 중간중간 내리막이나 평지가 나와도 부지런히 움직였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오르막에서도 리듬을 유지하려고 집중했습니다. 제일 어렵고 중요한 '제한 시간 안에 CP3 통과하기' 문제를 풀고 나니, 부족한 훈련량에 비해 아직 절반이나 남은 나머지 레이스를 여유 있게 운영할 수 있었어요.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은 막고 볼 것
날씨, 영양, 부상 등 다양한 요인이 퍼포먼스에 영향을 미치는데요. 가장 크리티컬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화장실입니다. 그 모든 훈련과 전략과 장비에 날씨마저 완벽하다 해도 ⚠️Code Brown💩 앞에선 무용지물이거든요. 다행히 저는 아직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을 겪은 적은 없는데 경험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화장실 찾을 때까지 멘탈 털리고 시간 까먹어서 목표고 뭐고 그냥 망한다구요. 그날은 must-have부터 단디해서 레이스 집중, 경치 구경, CP에서 간식 먹기, 사진 찍기 등 나머지 nice-to-have를 충분히 클리어할 수 있었답니다.
결승선은 마라톤 영상에서 본 적 있는 외쿡 엄마처럼 통과했습니다. 두 팔 벌려 달려온 아이와 얼싸 안으며 재회한 후, 많은 이들의 흐뭇한 미소 속에 손잡고 나란히 웃는 얼굴로 들어왔어요. '부상 없이 즐겁게 완주하기' 미션도 클리어하고, 어린 아들에게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낸 멋진 엄마의 기억까지 심어줬으니, 축하할 일로 가득한 대회날이었습니다.
스스로 벌인 일들에 안락할 날이 없지만, 그래도 역시 조금 어려운 문제를 푸는 편이 늘 더 많이 남는 것 같습니다. 조금쯤 슴슴해지면 아마도 다음 어려운 문제를 또 찾아나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