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쉬고 계신가요?

잘 쉬고 계신가요?

'모자무싸' 황진만은 인간은 행위(Doing)가 아닌 존재(Being)로 정의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쉴 때도 뭔가를 '함'으로써 잘 쉬어야 할 것 같은 현대인의 불치병같은 압박감을 내려놓긴 쉽지 않은데요. 뭔가를 해서 쌈빡하게 쉬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조차도 피곤한 맞벌이 육아기를 보내다보니 좋은 휴식의 요소를 어쩔 수 없이 체득하는 것 같습니다.


몸의 감각. 원래도 생각이 많은데 지식노동자로 살다보니 머리를 너무 많이 씁니다. 인간에겐 고도로 발달한 정신이 있지만, 그 정신이라는 것도 육체에 담겨있는 것이니까요. 쉬는 동안은 몸으로 기울여서 균형을 맞추려고 합니다. 몸의 감각을 일깨우면 머리는 저절로 잦아듭니다.

여행을 떠날 땐 요가 매트를 꼭 챙겨 갑니다. 평소보다 더 열심히, 어떨 땐 하루 두 번도 해요. 다운독 자세 할 땐 밑으로 들어오고 사바아사나 할 땐 위로 올라오는 아이 덕에 카오스지만, 하고 나면 몸이 환하게 밝아집니다. 그리고 가급적 욕조가 있는 숙소를 구해서 반신욕을 매일, 여유롭게 합니다. 온가족이 들어가서 지브리 애니메이션이나 슬램덩크 같은 거 하염없이 봐요. 중력을 거스르는 부력, 온몸을 뒤덮는 물의 감각에 몸을 맡기고 느긋하게 이완하면 뇌 주름 사이사이도 깨끗이 씻긴 듯해요.


핸드폰이 어딨더라. 핸드폰을 못 놓으면 잘 쉴 길이 없습니다. 회사 슬랙 알림, 놓치지 말라는 광고 알림, 읽어보라는 새 글 알림... 잠깐 확인만 하려고 들어갔다가는 한참을 빨려들어갈지 모릅니다. 그 뻔한 토끼굴로 안 끌려가려면 지금 있는 공간에 집중하는 게 좋은 방법입니다. 이 소파에 누워서 스피커로 음악을 듣고, 저 의자에 앉아서 창 밖 풍경을 보고, 푸릇푸릇 반짝이는 나무 밑에 나가서 좀 걷고 말이죠.

밤새 충전한 핸드폰을 아침에 뽑아서 하루 꼬박 보내고 저녁에 다시 봤는데 배터리가 아직도 90% 대면 웃음이 슬 나면서 속으로 '대박' 합니다. 핸드폰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만큼 머리도 세상만사에서 멀어져 에너지를 아낍니다. 백그라운드에서 쉬지 않는 업데이트로 닳아버리지 않고 기본 소비량으로 충분히 보내는 하루. 대박이죠.


즉흥성. 언제 어떤 상황에서 무엇이 필요할지 빠짐없이 생각해서 짐을 싸고 일정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기운이 빠지는 스타일이었는데 (네, TJ 입니다.) 언젠가부터 여행 계획을 짜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몸과 마음이 편히 쉴 수 있는 숙소. 그리고 그 지역에서 할 만한 몇 가지 옵션만 대강 정해두고 그때그때 몸과 마음의 상태를 살펴서 그때그때 정합니다. 스트레스 없고 편하더라구요.

역설적이게도 즉흥성은 최고의 '일정'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봐뒀던 식당이 마감했다셔서 동네 중국집 갔더니 탕수육이 역대급이고, 무더운 낮을 피해 오후 느지막히 바다를 찾았더니 그날따라 노을이 그림같고, 모임에서 전해 듣기만 한 지인의 식당을 찾았더니 운 좋게 마지막 손님으로 다찌 자리에 앉아서 말아주시는 도미 초밥 먹으며 즐거운 대화도 나누고. 우연으로 꿰진 순간들이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목적 없는 활동. Doing을 한다면 별 목적이 없어야 Being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마시멜로 구워먹기 클리어하고 인스타에 올릴 사진 찍는 불멍이 아니라 하염없이 불 쳐다보면서 입에 과자 던져넣고 얘기하다 보니 사진은 한두 장 남은 그런 불멍 말이죠. 아이가 있는 덕에 미니블록으로 '핫도그가 된 카피바라' 만들기 같은 활동에 동참하기도 합니다. 썩 내키진 않지만 제 자신이 괴롭지 않기 위해서라도 찐으로 열심히 해보는 쪽으로 마음을 먹는데요. 목적이라고는 '완성 후 귀여워하기'가 전부인 활동에 몰두하다 보면 어느샌가 치유와 휴식을 얻습니다.

5월에 묵은 숙소에서 앞마당 데크에 파라솔 펼쳐놓고 앉아있던 시간이 근래 떠난 여행 중 가장 좋은 시간이었어요. 머리 위 하늘은 파랗고, 앞 산은 푸르고, 산 밑 도로엔 자전거 무리가 지나가고, 바람은 솔솔 불고. 1.8L 물 한 병 들고 나가서 주거니 받거니 따라 마시며 다 만든 카피바라를 이번에는 그리고 칠하면서, 그냥 가만히, 존재하는 시간이 참 좋더라고요.


'우리'와 '지금'보다 큰 것들. 자연에 가까이 있을 때 진짜로 쉬는 것 같습니다. 문명이 지어내는 빛, 소리, 냄새에 비해 자연의 것들은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수천 킬로미터를 날았을 철새, 집 한 채를 집어삼킨 덩굴, 오랜 물살에 맨질맨질하게 패인 바위 같은 걸 보고 있으면 우리가 좇던 난다긴다 하는 것들이 좀 시시해지기도 합니다. 천문대에서 태양보다 훨씬 크고 뜨겁다는 베가(Vega)라도 보고 오면 나를 옭아매던 일들이 작고 가벼워져요.

요즘 출퇴근 길에 듣는 서양 고전 음악과 간간이 읽는 소설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인간의 칠정(七情)은 몇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구나. 이치대로 흘러갈 텐데 내가 너무 몰두했구나. 자연과 시간처럼 '우리'와 '지금'보다 큰 것들로 관점을 옮길 때, 거리가 생기고 위안과 휴식을 얻습니다.


2월의 긴 설 연휴를 보낸 뒤, AI를 둘러싼 학습과 실험으로 마침 쉬는 날도 없던 3, 4월을 쉼 없이 달렸습니다. 5월이 되어서야 쉬는 날을 이어붙여 긴 연휴를 보내면서 휴식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중간에 반차라도 써야겠다고 다짐해놓고 '버틸만 한데 휴가도 아낄 겸 좀만 더 버텨볼까' 한 걸 후회했거든요.

지난 달부터 육아기 단축근로 제도를 활용해 주 4일 32시간 근무하고 있습니다. 성취의 속도, 급여, 팀내 부담 등 여러 대가가 따르는 선택이었지만 이제야 정상적인 삶으로 서서히 돌아오는 느낌이 듭니다. 혹여나 아이 때문에 급하게 필요할까봐 휴가를 아끼느라 저 자신을 위한 휴식의 시간을 갖기는 언감생심이었거든요. 마이너스를 맴돌다 겨우 0으로 채우며 버티던 삶에서 이제야 0에서 시작하는 삶을 회복해가는 것 같습니다.

번아웃은 파괴적입니다. 앞당겨 쓴 리소스만큼 회복에도 빼앗깁니다. 단거리 달리기를 못해서 그런진 몰라도, 전력질주 후에 드러눕는 것보다 꾸준히 지치지 않고 달리는 게 더 멀리 가는 길이라고 점점 더 믿게 됩니다. 표정이 없어지고, 나도 모르게 날이 서고, 동료나 상사 때문에 자꾸만 부글거린다면 나를 돌볼 때라는 신호일지 모릅니다. 가장 높은 확률로 돌려세울 수 있는 건 우리 자신이니까요. 선명한 정신으로 좋은 판단을 하고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해서라도 잘 쉬어야 합니다. Not by doing, but by being.